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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여행] 루브르박물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실화 이야기

나라밖여행/서유럽

by 블루윙스 2018. 7. 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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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실화 이야기

 

 

프랑스 여행 중 파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루브르 박물관.

그곳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작품들 중 드농관 2층 77전시실에 있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은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인간의 감정과 정치적, 사회적 부조리에 반항하는 작품입니다. 491×716Cm 크기의 커다란 이 작품은 실물 크기의 사람들로 인해 그림 가까이 서면 실제 그들과 한 뗏목을 탄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루브르의 대표 작품들과 함께 이 작품도 반드시 봐야 할 작품으로 꼽힙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작품 사진이 제대로 나온게 없습니다. ㅠㅠ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루이 18세의 왕정복고 정권은 영국으로부터 넘겨받은 아프리카 세네갈을 식민지로 경영하기로 합니다. 이에 총독, 군대, 행정관리, 과학자, 의사, 기술자, 정착민들을 싣고 세네갈로 향하게 되는데요.

이 군함의 함장으로 프랑스대혁명 당시 해군 대위였던 쇼마레 백작이 왕정복고를 기회로 돌아와 해군 함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망명으로 인해 이십오 년 만에 첫 항해를 하게 된 쇼마레 백작은 무능함과 경험 부족으로 자신보다 유능한 부하들과 마찰을 빚었고, 1816년 7월 2일 급기야는 판단 오류로 전함이 좌초하게 됩니다.

군함에는 500여 명의 선원들이 타고 있었는데 구명보트는 6대 밖에 없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고급장교들이 보트를 타고 탈출을 하고 149명이나 되는 하급선원들은 길이 약 20m, 폭 약 9m의 구조용 뗏목을 만들어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의 계획은 보트에 뗏목을 묶어 탈출하는 것이었지만 밤의 추위와 공포를 겪은 선장은 두려워진 나머지 뗏목의 밧줄을 끊고 달아나버렸습니다.

 

 

뗏목에 몸을 실은 149명의 선원들은 첫날밤이 지나자 20여 명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안전한 가운데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이 일어나고 총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 65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 3일째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던 이들은 사람이 죽기 무섭게 인육을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구조가 되기까지 13일 동안 극심한 굶주림과 추위, 죽음과 질병, 폭동과 광기, 기아와 탈수, 식인의 생지옥을 겪었던 이들은 싸움, 살인, 발광, 자살, 병사, 익사 등으로 급격히 사람들이 줄어갔습니다.

 

 

표류 13일째 구조 당시에는 15명만이 구조가 되었는데 그중 구조 당일 4명이 죽고 이후 한 명이 추가로 사망해 생존자는 10명이었습니다. 이들마저도 정신적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왕정복고 시기 귀족 우선의 잘못된 함장의 임명으로부터 야기된 인재(人災)인 이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고, 생존자 중 한 인 외과의사가 당시의 경험담을 책으로 출간하는 바람에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27살의 제리코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제리코는 이 이야기를 토대로 작품을 구상하게 됩니다. 제리코는 실감 나는 장면을 위해 직접 뗏목을 제작하기도 하고, 병원을 찾아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들의 색깔과 질감을 관찰하기도 했으며, 생존자들을 찾아가 면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리코는 그림에서 표류 13일째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극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까지를 나누어 왼쪽의 삼각구도는 절망과 죽음을 표현하고, 오른쪽의 삼각구도는 삶에 대한 극단적인 희망을 표현합니다.

구조선을 발견하고 결렬하게 붉은 천을 흔드는 병사, 구조선 소식에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는 사람들, 그림에서 왼팔로 수평선 너머 구조선을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듯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외과의사입니다.

왼편 삼각 구도에서는 벌써 죽어 떠내려 가려는 시체와 구조선의 소식에도 삶을 포기한 듯한 선원, 상체만이 드러나 있는 선원 등 먹구름과 높은 파도 속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다시 그림의 전체 구도에서 왼쪽의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이어지는 구도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삶의 의지와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몸짓들로 이어져 지막에는 구조선을 향해 격렬하게 수건을 흔드는 적극적인 삶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1819년 살롱전에 작품이 발표되자 진실이 탄로 난 것에 대해 정부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고 그림에 대한 평가도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큰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제리코는 정부가 그림을 사주길 바랐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920년 런던과 더블린에 공개 전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여기에서도 그림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제리코는 이 작품을 완성한 지 5년 후, 평소 즐기던 승마를 하다 낙마하여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됩니다.

 

 

 

 

참고도서    윤운중의 '유럽미술관 순례'

               최영도의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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